본문 바로가기

Press

[대구신문]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폴란드 사진가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개인전 'Solid Maze: 견고한 미로'

흐릿한 순간 속에 쌓인 20년의 시간…사진으로 만든 ‘견고한 미로’
24일까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11월3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스페이스22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가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 걸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사진은 순간을 붙잡는 장르다. 흔히 쓰는 ‘순간 포착’이라는 말은 사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폴란드 사진가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에게 사진은 한순간을 고정하는 일보다 긴 여정을 이어가는 일에 가깝다. 그의 사진 속 인물과 풍경은 선명한 현재에 초점이 맞춰지기보다 흐릿하게 흔들리고, 겹쳐지고, 때로는 무엇을 찍었는지조차 정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그 모호한 이미지 안에서 과거와 현재, 기억과 경험이 서로 포개진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의 개인전 ‘Solid Maze: 견고한 미로’가 대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10월 2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이후 서울 스페이스22에서 11월 3일부터 21일까지 순회전으로 열린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그의 개인전이다.

전시는 2024년 출간된 동명의 사진집을 바탕으로 한다. 사진집에는 20여 년 동안 촬영한 300점 이상의 사진이 담겼다. 2006년부터 2026년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폭이다.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만들어진 사진들이 한 권의 책 안에서 만나고, 이번 전시는 그 이미지들을 다시 선택하고 배열해 하나의 공간으로 확장했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전시장 전경.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흐릿한 이미지가 드러내는 시간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이미지의 모호함’이다. 인물은 움직임 속에서 흔들리고 풍경은 윤곽을 잃는다. 한 장의 사진만 놓고 보면 무엇을 찍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즈비에르스키는 이런 흐릿함을 특별한 효과로 인식하지 않는다.

“사진이 꼭 포커스가 선명하게 맞고 현실을 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진을 사용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선명한 재현보다 현실이 지닌 움직임과 시간성이다. “세상에는 굉장히 다이나믹한 순간들이 많고, 저는 그 다이나믹한 순간들을 다이나믹하게 촬영했을 뿐입니다.”

현실은 정지해 있지 않다. 사람은 움직이고 빛은 변하며 풍경은 계속해서 달라진다. 사진이 셔터를 누르는 순간 하나의 장면을 멈춰 세우더라도, 그 장면을 둘러싼 시간까지 함께 멈추는 것은 아니다. 즈비에르스키의 흐릿한 이미지는 바로 이 지점을 보여준다. “흔들림과 겹침은 시간이 지나가는 흔적입니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그의 사진에서는 한 장의 이미지 안에서도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감지된다. 사진은 한순간을 기록하지만, 그 안에는 이미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 이어질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즈비에르스키는 사진을 “시간을 붙잡고 있는 굉장히 독특한 매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시간은 사진을 찍는 순간의 시간, 오랫동안 보관하는 시간, 다시 사진을 꺼내 바라보는 시간, 새로운 작업으로 선택하고 배열하는 시간, 그리고 관람객이 그 사진을 바라보는 시간까지를 의미한다. 이는 그의 사진을 하나의 사건을 기록한 결과물이라기보다 여러 시간의 층이 겹쳐진 이미지로 보는 배경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아카이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팬데믹으로 여행을 멈춰야 했던 시기, 그는 오랫동안 보관해온 사진들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봤다.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을 비롯해 거의 모든 작업을 꺼내놓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 과정에서 사진의 의미가 달라졌다.

촬영 당시에는 수많은 사진 가운데 한 장에 불과했던 이미지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선택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사진의 의미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시간 속에서 계속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사진 한 장보다 사진들이 함께 있을 때 만들어내는 아우라가 있었습니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기억은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사진에서 추구하는 것은 견고함이다. 시간의 축적은 견고함을 고양하는 방식이다. 전시 제목 ‘Solid’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ㄴ다. 작가가 말하는 견고함은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힘, 수많은 이미지가 축적되며 만들어내는 지속성과 연속성”이다.

‘Solid’가 시간의 축적을 의미한다면 ‘Maze’는 그 시간이 움직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기억은 오래전에 잊었던 기억이 냄새나 장소, 사람의 얼굴 하나를 통해 갑자기 되살아나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과거의 장면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한다. 하나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내면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즈비에르스키의 사진도 이와 같은 구조를 띤다. 전시장에는 명확한 시작과 끝이 없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이 한 공간에 놓이고, 관람객은 그 사이를 오가며 나름의 연결고리를 발견한다. 어떤 사진은 형태로 연결되고, 어떤 사진은 분위기와 감정으로 이어진다. 또 어떤 사진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직관에 의해 다른 이미지와 관계를 맺는다.

평론가 쿠바 슈쿠들라레크가 이 전시를 ‘아리아드네의 실’에 비유한 것도 이러한 구조와 맞닿아 있다. 미궁에 들어간 테세우스가 길을 잃지 않도록 아리아드네가 건넨 실처럼, 즈비에르스키의 전시에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실은 관람객을 하나의 정답으로 이끄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따라 미로를 통과하도록 돕는 최소한의 단서다.

이러한 사진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여행’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15세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카메라를 받은 뒤 사진을 시작한 즈비에르스키는 영화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고, 2012년부터 2019년까지 시베리아와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샤머니즘과 전통적인 의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특정 지역의 풍경이나 문화를 설명하기보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상황, 그 순간 자신에게 일어난 감각에 집중한다. 낯선 것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친밀감이 생기는 순간에 그는 카메라를 든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사진을 찍는 행위 역시 계획된 목적지보다 우연과 직관에 가깝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이 사람을 아주 오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순간도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그는 여행을 ‘집에 생긴 새로운 방’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집은 실제 공간이 아니라 삶 자체다. 새로운 곳을 경험할 때마다 삶이라는 집에 하나의 방이 더해진다. 여행뿐 아니라 음식이나 새로운 경험 역시 그 방을 넓히는 요소가 된다.

“제게 장소는 출발점일 뿐, 제가 찾아가는 것은 특장소와 시간을 넘어 인간에게 남는 어떤 감각과 본질입니다.”

피오트르 즈비에르스키 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발견하는 낯선 친밀감

그의 사진에서는 사람과 자연이 특별한 위계 없이 등장한다. 인물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기도 하고, 자연의 형태가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한다. 때로는 나뭇잎이나 자연물의 형태에서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순간도 발견된다.

즈비에르스키가 말하는 자연의 ‘영혼’은 자연에 인간적인 의미를 억지로 부여한다는 뜻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감각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낯선 얼굴에서 익숙함을 발견하고, 나뭇가지의 형태에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처음 가본 장소에서 오래전 기억을 느끼기도 한다. 현실의 어떤 형태가 개인의 경험과 만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즈비에르스키는 바로 그 찰나의 감각에 반응한다. 그가 말하는 직관은 무엇을 찍어야 하는지 미리 결정하는 판단이라기보다, 눈앞의 장면과 자신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울림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사진을 시각적인 매체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사진은 좋은 정보를 제공한다"는 일반적인 사진의 선입견을 걷어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관람객의 내면에 어떤 감각을 일으키는. “사진을 보면 우리는 이게 어떻게 찍혔는지, 어디에서 찍었는지 정보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정말 감동을 주는 사진은 우리를 ‘터치’합니다.”

그는 사진을 선택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독특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이 선택됐다는 것은 이미 수많은 이미지 가운데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사진이 잘 찍혔는지 못 찍혔는지보다 그 시대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이러한 시선은 사진을 단순히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로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난다. 사진의 가치는 이미지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진이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 축적된 경험 역시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대구신문 2026.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