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이다. 숲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초록 잎은 사라졌고, 빽빽하게 자란 가지들이 또렷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조명을 받아 드러난 나무의 모습은 지나온 시간을 말해 준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 뜨거운 화염을 고스란히 받아 낸 나무다. 집어삼킬 듯 달려들던 붉은 화염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자욱하던 검은 연기도 사라졌건만, 나무는 그 시간을 온몸에 새긴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불이 거기에 있었다는 흔적, 인덱스(index)를 간직한 채.
하리 팰비란타(Harri Palviranta)는 핀란드 헬싱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이자 사진 연구자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거주지 인근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의 흔적을 ‘Burn Index’ 시리즈로 기록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불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서구에서는 더는 화전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산림 면적의 감소가 산불 발생을 줄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기후변화라는 또 다른 변수의 등장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대형 산불이 다시 등장했다. 불은 더 빠르게 번지고, 더 오래 타며, 더욱 거대한 규모로 확산한다. 통제의 역사 위에 겹쳐진 불가항력의 현실. 팰비란타는 산불 이후의 풍경을 더욱 집요하게 다층적으로 응시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미국, 호주 그리고 한국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은 타오르는 순간이나 피해 장면을 확대하지 않는다. 재난의 스펙터클을 만들거나 고통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대신, 그저 불이 지나간 자리에 멈춰 서서 우리에게 함께 사유하길 권한다. 산불을 둘러싼 상황은 복합적이다. 자연적 원인이든 인간의 실수든, 반복되는 산불은 더 빠르게 광범위한 파괴를 남긴다.
카메라에 장착한 플래시가 나무를 비추자 눈으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 드러난다. 그의 말처럼 나무의 ‘초상’이 포착됐다. 다시 사진을 보자. 안동이나 동해안 등에서 만날 수 있는 측백나무다. 대형 산불은 그 푸른 형체를 앙상한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 닿았기에 남은 자국, 이곳의 ‘Index’. 이 흔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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