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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중앙SUNDAY] [사진 한 잔] 우크라이나, 로만을 기억하다

Kharkiv, Ukraine, 2022. ©Paula Bronstein


손에 횃불을 든 사람들. 타오르는 불꽃은 어둠을 밀어 올리고, 하늘을 뒤덮는 자욱한 연기 사이로 구호가 울려 퍼진다. “영웅은 죽지 않는다.” 2022년 6월 24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독립광장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종탑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국기가 덮인 관 앞에서 사람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존경을 표했다. 스물네 살의 한 청년이 러시아와의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보 사령부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청년의 이름은 로만 라투슈니(Roman Ratushnyi).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파괴하려는 모든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은 오랫동안 분쟁과 재해 현장을 취재해 온 포토저널리스트 폴라 브론스타인이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미얀마·우크라이나 등 세계 곳곳의 갈등 지역을 오가며 총성과 폭발이 아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국가 권력과 개인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을 관찰하고, 극적인 순간 포착보다 전쟁이 일상에 남긴 흔적과 사람들의 감정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녀는 전쟁을 ‘전장’이 아닌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표현한다.

로만 라투슈니는 2014년 열여섯 앳된 나이에 우크라이나 정부의 친러시아 정책 전환에 항의하는 ‘존엄의 혁명’에 참여했다. 2018년 스무 살에 키이우의 녹지를 지키기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었다. 2022년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누구보다 먼저 자원입대해 전선으로 향한 스물네 살 청년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전쟁이 파괴한 우크라이나의 미래 세대를 상징한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속에는 러시아 침공 이전부터 이어져 온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선택과 저항, 그리고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려 했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사진 속에 라투슈니의 모습은 없다. 대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로만 라투슈니. 그는 오늘의 우크라이나가 지나온 시간과 그들이 지켜내려는 미래의 상징이다.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중앙선데이 2026.01.31 979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