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체를 외부 역사서 역사 품은 풍경으로 치환
독립운동가 길·역사 현장 등 담아
기억은 사회 전체가 공유할 자산
적·영 등 여섯 개 섹션으로 구성
좋은 사진은 스스로 말하는 사진
‘아시아 日 전쟁 흔적 기록’ 출발
역사가·언론인 등 협업 방식 진행

“사진은 무엇을 기록하고, 사진가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사진가 이재갑에게 이 질문은 30년 가까운 작업 인생을 관통한 화두다. 오랜 시간 그의 시선이 응시한 곳은 세상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였다. 그의 카메라는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는 곳,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 공식적인 기록에서 소외된 역사 속 장소와 사람을 응시했다.
◇ ‘모서리’, 기록자의 시선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최근 개막한 이재갑의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개인전 ‘모서리(CORNER)’는 그의 익숙한 시선에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객관적인 거리에서 역사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나 장소의 흔적을 응시하던 시선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 변화에 대해 그는 “갑작스러운 작업의 전환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나의 내면을 투영한 이번 신작들은 30여 년간 이어온 나의 사진적 탐구가 또 다른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재갑은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의 상처와 기억을 기록해 왔다. 일제강점기 군함도, 원폭 피해 한국인,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베트남전쟁 피해.자, 혼혈인 등 역사 속에서 잊히거나 외면된 장소와 존재들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역사 기반 사진”이라는 이재갑의 트레이드마크가 작업 초기부터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초기 작업은 자연, 국경, 강, 섬 등의 자연 풍경이었다. 작업의 변화는 풍경 작업이 무르익을 때쯤에 찾아왔다.
어느 날 스스로에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누구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질문이 차올랐고, 자연스럽게 역사 속 장소와 사람들로 대상이 옮아갔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걸었던 길,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흔적이 남은 공간들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사는 늘 기록되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인물보다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삶 역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견지했다. 그런 이유로 그의 사진은 영웅을 기념하기보다, 이름 없이 스쳐 간 이들의 흔적을 담는 것에 집중됐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시선은 외부의 역사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군함도와 전쟁의 흔적은 고요한 바다와 땅, 하늘 사이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사회적 상처를 품었던 인물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과 빛의 결로 치환됐다.
그러나 그는 “전작과 신작은 대상만 달라졌을 뿐 작업의 본질은 같다”고 말한다. 그의 사진은 언제나 거대한 사건보다 시간을 살아낸 존재와 그들이 남긴 기억에 관심을 두었다. 과거에는 사회가 남긴 흔적을 따라갔다면, 이제는 자신의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흔히 보는 풍경에서 역사와 관련된 풍경으로, 그리고 작가의 직관이 담아낸 풍경으로 피사체를 달리한 것은 분명 큰 진폭의 변화다. 하지만 서로 연결성이 없을 것 같은 피사체들 사이에 공통된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이 곧 ‘시간의 중첩’이다. 그가 “내 시선이 응시한 곳에는 언제나 그 속에 켜켜이 쌓인 시간과 기억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가 사진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그는 사진을 “현재의 공간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불러내는 매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현재의 풍경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오랜 세월 그곳을 스쳐 간 사람들의 삶과 역사,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고, 사진은 눈에 보이는 현재를 기록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과거의 시간을 오늘로 불러내는 통로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역사적 장소를 촬영할 때도 건물이나 풍경 자체보다 그 공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공기와 빛, 침묵을 바라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역사 앞에서는 기록자, 내면 앞에서는 참여자
이번 전시는 적(跡), 영(影), 적(赤), 상(傷), 지(誌), 류(流) 등 여섯 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오며 마주했던 경험과 감정을 각각의 색으로 상징화했다. 그는 이번 신작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동안 계속 해오던 작업인데 발표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
그는 이번 작업을 “개인적인 의미를 사회적인 언어로 풀어낸 서정적 다큐멘터리”라고 설명한다. 전작들이 역사가 남긴 시간을 응시해 왔다면, 이번 신작은 그 시간을 바라보던 사진가 자신의 내면을 향한 기록이다. 사회의 기억을 오래 들여다본 끝에, 이제 그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까지 닿은 것이다.
그 출발점에서 만난 근본적인 질문이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내가 이 작업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는 사진가로 살아온 30년 동안 만나온 사람들, 기록해 온 역사, 견뎌온 시간들이 자신의 내면에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를 기록할 때와 달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자 사진을 대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그는 판단보다 관찰자를 자임했다. “세상에 옳고 그름은 없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그가 관찰자로서 가지는 시선이었다.
이런 생각 아래 베트남전쟁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의 흔적들을 기록하면서 특정한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사진은 역사에 대한 재단보다 우리가 외면했던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였다. 그는 “역사는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억은 누구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공유해야 할 자산이라는 것.
반면 자신의 내면을 향한 작업에서는 기록자가 가지는 거리감을 내려놓았다. “나는 늘 사진 안에 들어가 있다. 그림자로 들어가 있든 손가락이나 발로 들어가 있든 어떤 형태로든 내가 있다.” 이번 전시의 풍경 속 그림자는 작가 자신이다. 역사 앞에서는 관찰자였던 그는 이제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품은 참여자가 된다.

이재갑이 대상과 관계 맺을 때, 필요하다고 여기는 덕목은 ‘기다림’이다. 그는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사진은 찰나 포착이나 재현이라는 사진 고유의 기능을 뛰어넘는다. 그에게 사진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시간이 축적되며, 의미가 스스로 드러나는 과정을 담아내는 일이다.
베트남에서의 작업은 ‘기다림’을 기반으로 한 대표작이다. 그는 베트남 작업 당시 하루에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기보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렀다. 어떤 사진은 완성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 “자연의 시간이 흐르고 대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 신작도 같은 흐름을 유지한다.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관계를 맺으며 이미지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에게 기다림은 전작과 신작을 잇는 가장 중요한 태도다. 달라진 것은 방향뿐이다. 과거에는 사회의 기억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면, 이제는 자신의 내면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역사 속 비극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과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신작 사이에 또 다른 유사성도 발견된다. 그것은 ‘사람’이다. 역사적 사건을 기록할 때 그가 응시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 역시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됐다. 그의 사진에서 역사와 풍경, 기억은 모두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통로일 뿐, 궁극적으로 카메라가 향하는 대상은 언제나 ’인간‘이다.
그는 좋은 사진을 “사진 스스로가 말하는 사진”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본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사진가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 제목인 ’모서리‘ 역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모서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실과 기억, 기록과 해석이 맞닿는 경계를 의미한다. “사유의 끝이 모서리다. 생각과 성찰의 끝이 모서리다.” ‘모서리’는 30년 동안 중심보다 가장자리를 응시해 온 그의 사진적 사유가 도달한 하나의 좌표이기도 하다.

황인옥기자
◇ 동아시아 프로젝트, 개인의 기록을 넘어 공동의 기억으로
이번 전시는 앞으로 진행할 ’동아시아 프로젝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의 흔적이 남은 아시아 각지를 찾아 국가의 공식 역사 뒤에 가려진 개인의 기억을 기록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사진가 혼자만의 작업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사진가와 역사 연구자, 영상기록자, 언론인, 기획자 등이 함께하는 협업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 프로젝트를 위한 기금 마련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에게 사진은 여전히 시간을 기억으로 바꾸는 일이다. 이번 ’모서리‘전이 자신의 내면을 향한 기록이라면, 앞으로의 동아시아 프로젝트는 그 기억을 공동의 역사로 확장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전시는 2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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