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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문] [전시 따라잡기] 이순희 사진작가 개인전…아트스페이스 루모스 29일까지

“유물 사진은 단순한 기록 넘어 예술작품 가치도 가져야”
깨진 유물도 촬영할 땐 ‘존재감’
파편화 되어 있어도 가치는 명품
깨짐 포용 때 ‘새로운 가치’ 생겨
사진은 보이지 않는 것 포착해야
사진 작업하다 민속학과 진학도
한국문화재단 의뢰로 전국 누벼
사진 한 장에 모든 정보 담아내야
계림 숲·당산나무 등 시리즈 확장

 
이순희 작 '병'.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완벽하게 보존된 유물과 깨진 유물은 발굴되는 순간, 운명이 갈린다. 유물을 만든 장인의 손길, 당시의 기술력, 시대적 미감의 결정체로 완벽하게 발굴된 유물은 박물관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관람객의 찬사를 받으며 시공을 초월한 명품의 삶을 살아간다. 그에 반해 생채기 난 채로 발견된 유물은 사료로서의 가치는 부여받지만, 복원과 함께 박물관 깊숙한 장소로 이동해 또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땅속에서 땅위로 올라왔지만 관심 밖인 것은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깨진 유물이 마냥 조연인 것만은 아니다. 주인공 대접 받는 순간이 딱 한 번 있기는 하다. 보관소로 가기 직전에 색인표 작성을 위한 사진을 촬영할 때다. 단 한 번이지만 깨어져 생채기 난 유물들은 가장 화려한 조명 아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낸다. 비록 사진을 촬영하고 나면 보관 장소로 직행하지만, 사진은 갤러리의 은은한 조명 아래 새로운 존재감으로 재탄생한다.
 

이순희 작가

 

사진가 이순희 작가는 유물에 새 숨을 불어넣는 현장을 지난 20여년 간 지켰다. 발굴된 유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 인연들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이순희 개인전에 펼쳐 놓았다. 이번 전시에는 땅속 깊은 침묵에서 깨어났지만 온전하지 못한 환생으로 다시 침묵의 세계로 향해야 하는 깨진 유물, 그 중에서도 도자 사진 30여점을 걸었다.

 

이순희 작 '몽'.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전시 제목이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다. 침묵하고 있지만 존재감만은 그 어떤 외침보다 강렬하다는 의미가 전시 제목에 담겼다. 사진 속 유물들은 삼국시대 전후의 산물이다. 어림잡아 2천년을 땅 속에서 침묵했던 존재들이다. 온전하게 보존됐든, 파손됐든 그 긴 세월을 땅 속에 묻혀있었다는 것은 유물에 또 하나의 서사가 부여된 셈이다. 인간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았지만 인간과 단절된 땅속에서 스스로 서사를 만들었다. 그것은 곧 ‘존재감’이다.

 

이순희 작가가 유물 사진을 촬영할 때, 의식하는 것은 ‘존재감’이다. 유물을 침묵의 대상이 아닌 발산의 대상, 즉 살아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땅속이나 땅위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보며 영생을 누렸기에 그 자체로 위대하다는 인식을 사진 속에 이입한다. 이번 전시에 걸린 깨진 유물 사진들에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과 또 다른 정서가 깔려있다. 그것은 ‘차별 없는 시선’이다. 비록 파편화되어 명품의 자태와는 동떨어졌지만 존재만큼은 명품과 다르지 않다는 시선이다.

“누구나 예쁜 사진을 원하듯, 유물도 예쁘게 찍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조명을 점검하고 유물이 가진 고유의 형태미를 찾는 등 단 한 컷의 사진을 얻기 위해 1시간 이상을 투자한다. 사진을 촬영하는 순간만큼은 최고의 대우를 해 주고 싶었다. 대상과의 깊은 교감으로 침묵하는 존재들의 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믿음에 따라 사진 촬영 때 최선을 다해 임했다.

이순희 작 '옹'.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완전함과 불완전함 사이에서 더 크게 끌리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사진에선 완벽한 유물도 가치롭지만, 깨진 유물도 의미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다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산산조각 난 파편들로 이어 붙인 도자기에선 시간이 남긴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그 흔적들에서 시간의 깊이가 더 짙어지기 때문이다.

깨진 파편들을 연결하고 금간 부분들을 메워서 최대한 복원하려 하지만 복원 이전의 여정들은 여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온전하게 태어났지만 세월의 풍파에 거친 여정을 지나온 역사가 복원 후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깨진 것에도 깨진 것의 미학이 있기 마련. 깨짐을 포용했을 때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난다. 그것은 곧 불완전한 존재들이 가지는 공감과 위로다. 깨진 도자기의 균열에서 감상자들은 생채기로 얼룩진 자신의 삶은 발견한다. 유물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지만, 실상은 과거의 유물이 현재의 우리에게 시간과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사진의 가치는 사물의 재현보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포착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유물을 촬영할 때 그 유물이 가진 존재감까지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가 유물과 만남 것은 2001년이다. 대학 재학 시절 통도사 성보박물관 전시물을 촬영하기 위해 사찰을 거닐 때 박물관측에서 연구자료 사진 촬영을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2003년에 국가유산진흥원 전신인 한국문화재재단 유물 촬영 의뢰를 받아 지금까지 다양한 발굴 현장의 유물들을 촬영해 왔다. 경상권은 물론 충청권, 전라권, 경기권 등 전국에서 출품된 유물들을 촬영했다.

그가 얼마나 유물 사진에 진심인지는 그의 행보가 말해준다. 유물 사진 작업 중에 안동대 민속학과에 진학해 전통문화와 민속을 공부한 것은 대표적인 행보다. 이런 행보 이면에는 “유물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라는 진정성이 숨어있다. “한 장의 유물 사진에는 유물의 형태와 특성 등의 모든 정보를 담아내야 합니다. 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니까요.”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유물 사진에 예술성을 극대화 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선 작가 자신의 역량이 한껏 개입된다. “저의 유물 사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도 가질 수 있도록 촬영에 임했습니다.”

이순희 작 '호'.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제공

 

유물의 민속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은 ‘당산나무’, ‘한옥벽체나 문’, ‘경주 남산에 분포되어 있는 문화유적’ 등으로 확대됐다. 경주 남산의 문화유적들을 촬영한 ‘경주, 천년의 그들(Gyeongju, Thousand years of theirs)’ 시리즈에선 절터를 지키는 석탑, 깨진 불상들을 대상으로 한다. 촬영시점은 주로 초목 무성한 여름이나 해질 무렵을 선호한다. “고독감 극대화”가 이유다. “주변의 지형을 어렴풋하게 처리하며 긴 시간성을 지켜온 문화유적의 고독감을 부각합니다.”

 

‘정령의 숲(Forest of spirits)’ 시리즈는 경주의 계림 숲을 촬영한 작품이다. 그는 계림의 나무들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팔을 뻗어 하늘을 이고 지하로 뿌리를 내려 살아 숨 쉬려는 나무의 영혼을 감지했다. 그것은 곧 만물에 깃들어 있는 신령한 기운을 의미했다. “‘정령의 숲’ 시리즈에선 주변의 배경을 어둡게 하고, 나무의 형태가 잘 드러나도록 촬영했습니다. 인간의 오관(五官)으로는 볼 수 없는 ‘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보편적 감각기관인 내적 감각기관을 이용하며 ‘영’을 시각화했습니다.” 그에게 ‘영(靈)’이 곧 존재의 본질이며 정신이다.

‘당산나무(Shrine tree)’ 시리즈는 ‘정령의 숲’ 시리즈를 촬영하며 나무의 수종을 조사하던 중 계림의 묘목 수종들이 회화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등 박달나무과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 당산나무는 단순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신단수라는 성스러운 당산 나무를 타고 태백산(백두산) 꼭대기에 내렸다는 신화로 인해 고조선 때부터 제를 올리며, 공동체의 안녕을 비는 영험한 나무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2015년 봄에 당산나무가 싹을 틔우기 위해 물이 오른 것을 보고 꽃을 피운 것같은 숭고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산나무의 생명력과 존재감, 그리고 신령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이른 봄, 밤 시간대에 촬영을 했습니다.”

신령한 나무 사진의 연장에서 전통 한옥의 벽이나 문을 촬영한 ‘나무, 집이 되다’ 시리즈로 확장됐다. 죽어서 건축의 일부로 새로운 생명력으로 거듭난 나무의 긴 생명력에 대한 찬사다.

이순희의 사진 세계는 토속적이다. 처음 유물 사진 촬영을 의뢰 받았을 때, 고민 없이 흔쾌히 수락했던 것도 그의 내면에 내재된 토속적인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태도가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고향이자 현재 거주지인 경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전시는 29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대구신문 2025.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