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춥고 긴 유럽의 겨울, 거기다 해가 없는 날이 많아 체감온도는 더 시리기만 하다. 동유럽의 보석 슬로베니아에서는 추운 겨울을 쫓아버리기 위해 가면을 쓴 괴물들이 등장하는 특별한 카니발이 있다. 바로 슬로베니아판 사육제 푸스트(Pust)다. 이곳의 푸스트는 기독교가 도래하기 수백 년 전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카니발과 달리 마을마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고유한 전통과 정체성을 자랑한다. 인구가 수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 체르크노(Cerkno)에서 열리는 푸스트 라우파리자(laufarija) 역시 마찬가지다.
체르크노에서 열리는 라우파리자에는 유럽 피나무로 만든 가면을 쓴 25개의 전통적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중 주요 캐릭터가 바로 큰 코와 큰 턱, 들쑥날쑥한 커다란 치아를 가진 이들 ‘실의 남자(Ta terjast)’다. 천을 만들고 남은 실로 만든 옷을 입고 군중 속을 뛰어다니며 가면들의 퍼레이드를 살피고, 체르크노 방언으로 진행되는 연극에서 겨울과 지난해의 묵은 잘못들이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질서를 잡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파리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미국 사진가 제이슨 가드너(Jason Gardner)는 실의 남자들처럼 가면을 쓰고 매년 카니발에 꼭 등장하는 전통적인 캐릭터들을 We the Spirits, 즉 시공간을 초월한 ‘영혼’과 같은 존재라 표현한다.
“이 가면을 쓰면 절대 죽을 수 없다.” 실제 캐릭터를 연기했던 이의 말이다. 가면을 쓰는 순간 현재의 시간과 규칙은 사라지고,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또한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할 인물로 스며들기 때문이리라. 가드너는 파티와 같이 흥미롭게 과잉 생산된 카니발의 이미지, 그 고정관념과 대척점에 선 사진가다. 15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전 세계의 전통적인 카니발을 누비며 시각 인류학적 관점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옷이 두 배로 무거워져 걷기 어렵다는 나무 캐릭터, 대를 이어 곰 캐릭터를 물려받은 아들까지 아날로그 필름으로 대부분 촬영된 제이슨의 사진집 『We the Spirits』을 보고 있노라니, 봄이 성큼 다가와 있다.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중앙선데이 2025.03.15 933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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