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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제일일보] [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네




‘바오 밥 나무는 너무 늦게 손을 쓰면 절대로 없앨 수 없다. 나무가 별 전체를 가득 덮고, 뿌리들이 사방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 아주 작은 별에 바오 밥 나무가 너무 많으면, 별은 그만 쪼개져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그건 규율의 문제야.” 얼마 뒤에 어린 왕자가 말했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박선주 역(譯), 마음시선, 2021>

얼핏 읽으면 어린 왕자와 바오 밥 나무는 사이가 불편하고 대립각을 세우는 듯하다. 아니다. ‘작고 외로운 별, B612’를 지켜주려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저자도 이 책을 발간할 때 그런 마음을 서문에 밝혀 놓았다. 유대인 출신 프랑스 작가이자 절친이었던 레옹 브레트에게 남긴 말. ‘그는 지금 프랑스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고통받고 있어서 위로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최근 ‘안녕♡바오’라는 동화 에세이를 펴낸 박남준 시인도 한마디 거들었다. 바오 밥 나무를 무고한 죄, 세상에 나온 모든 ‘어린 왕자’ 책을 회수하고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라고 너스레를 떤 일이 있다. 생텍쥐페리가 만난 바오 밥 나무는 사하라에 있었다. 지구상에 모두 9종이 있다. 1종은 호주, 2종은 아프리카 대륙, 나머지 6종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란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할까 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정혜원 씨 사진집, ‘마다가스카르- 파란 기억, 시간을 가르다’를 살펴본다. 그린란드, 뉴기니, 보르네오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을 작가는 5년간, 여러 차례 이곳을 방문해 전경(全景)은 풍경으로 놓고 진짜 이야기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가 찍은 사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 살만한 형편이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법을 이미 터득한 이들이어서 가능하다.

작가 의도는 분명하다 ‘푸른’(blue)을 앞세운 이유가 있다. 이들은 ‘희망’이라는 귀한 보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는 사진집 첫 페이지에 배치되어 있다. 세 그루 나무가 높이 솟아있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은 적막한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 아래, 남아있는 빛으로 책을 읽고 있는 남자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둘레가 너무 커서 다른 쪽에선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마다가스카르 남쪽 끝 툴리아르 바오 밥 나무에 기대어 서 있는 원주민들 모습도 인상 깊다.

정혜원 씨는 촬영 장비를 ‘산소통’이라 부른다. 어렵고 힘들 때 숨 쉬게 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라는 말이다. 사진기를 ‘장비빨’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가하는 일격(一擊)이다. 로버트 카파가 사용한 카메라는 현대 장비보다 열악했지만 충분히 공감하는 사진을 많이 남겼다. 프레임에 가두는 일이 아니라 확장 시켜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

작가는 ‘어린 왕자’에 매료된 바 있다. 처음 마다가스카르를 방문했을 때는 웅장함에 넋이 나갔지만 매력은 마력(魔力)으로 변해갔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가진 소박한 아름다움이 주는 울림. 언어도 통하지 않은 답답함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눈빛만으로도 소통은 충분했다고 한다. 촬영 기간 편안한 숙소보다는 원주민 마을 바오 밥 나무 군락지에서 직접 준비해 간 텐트를 치고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사진집 발간을 계기로 지난달 대구, 사진 전문 갤러리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정 작가 다음 행보는 해녀(海女)다. 사라지고 스러지는 일상을 일으켜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은 내년에 공개할 예정이란다.

이 글을 쓰는 데 생각난 책 한 권, 소설가 황석영 씨가 쓴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시와 시학사, 1993> 그렇다. 고통이라 말하면 너무 억울하다. 오해는 더욱 분통을 터뜨린다. ‘사람’을 생각하면 ‘삶’도 따뜻해야 하는 법이다. 여기나 거기나 사람이 한가운데를 차지해야 마땅하다. 이쁜 사진보다 믿음이 담보된 ‘미쁜’ 작품이 빛나는 법이다.

전쟁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를 다시 소환한다. ‘만약 당신이 사진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은 때문이다.’ (If your pictures are not good enough, you are not close enough.) 그래, 한 발 짝 더 가까이 가보는 거야.


울산제일일보 2024.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