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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중앙SUNDAY] [사진 한 잔] 사랑이 암을 이긴다

Love Kills Cancer, Florida, 2008. ©John Kaplan

 

다부진 어깨의 한 남자. 그가 입은 붉은 셔츠엔 ‘사랑이 암을 무찌른다(Love Kills Cancer)’는 문구가 강렬한 선언처럼 새겨져 있다. 흐릿하게 포착된 학생들은 미소를 띠거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 사람은 누구이며 지금은 어떤 순간일까. 이 강렬한 뒷모습의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진가다. 1992년 퓰리처상을 받고 로버트 F 케네디 저널리즘상을 두 차례나 받은 사진가. 바로 존 카플란이다.

록밴드 가수, 불법체류자, 패션모델, 미식축구선수 등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여건 속의 미국의 21세 청년들. 그들이 힘든 현실을 버티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심층 취재한 ‘Age 21 in America’로 카플란은 퓰리처상을 받았다. 성공적인 사진가로,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교수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의 삶은 ‘완벽한 그림’ 같았다.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암과 싸운 나의 이야기’라는 전형적인 서사에 거부감이 컸던 그는 수술 직후까지도 카메라를 들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실 거울 앞에서 충동적으로 셔터를 누른다. 자신의 몸에 난 수술 자국과 낯선 머리 모양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항암 치료의 시간을 기록한 ‘Not As I Pictured’ 작업이 시작됐다.

광각 렌즈와 리모트 컨트롤러로 자신을 촬영한 이 작업은 단순한 투병기가 아닌 치료의 과정이 되었다. 주변의 도움과 사랑 속에서 그는 더 깊게 가족애를 경험했다. 그의 작업은 질병의 고통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공존하는 삶의 기쁨과 의미를 함께 드러냈다. 다시 사진을 보자. 교수로 일한 지 10년, 개학 후 첫 수업을 시작하려는 순간이다. 주치의는 일을 계속할지 말지 스스로 선택하라고 했지만, 그는 단지 질병의 ‘희생자’로 규정되기는 싫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카플란은 이날 처음으로 강단에서 긴장했다고 한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되, 학생들을 두렵게 만들면 안된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는 모자를 벗어 올렸다. 비록 삶이 그가 그리던 모습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오늘은 여전히 내게 주어진 선물이며, 이 시간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하나의 축복임을 말하듯이.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중앙선데이 2026.04.25 991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