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서 쪽잠을 자는 소년, 그 곁에 코끼리가 조용히 서 있다. 거대한 몸집은 코끼리의 힘을 드러내지만, 자세와 눈길은 소년의 단잠을 지켜주는 듯 다정하기만 하다. 소년의 직업은 코끼리를 다루고 돌보는 마후트(Mahout). 수천 년 전 왕실 의식과 종교 행사, 혹은 벌목 현장에서 코끼리를 관리하던 전문직이었지만, 오늘날 마후트는 주로 구조된 코끼리를 보호구역에서 평생 돌보는 동반자의 역할을 한다.
태국 치앙마이의 한 보호구역에서 이들을 담은 이는 동시대 전설적인 사진가로 불리는 스티브 맥커리다. 20세기 사진계의 모나리자로 불리며, 전 세계 시각문화의 상징이 된 초록빛 눈동자의 아프간 소녀를 담았던 그 사진가다. 어느 날 그는 아카이브를 정리하던 중 자신이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미국과 유럽 등에서 방대한 동물 사진을 기록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과 동물을 동등한 지위로 바라보며 감정과 맥락을 담은 그의 사진집 ‘Animals’를 두고 평론가들은 “지구에 바치는 헌사”라 평가하기도 했다. 전쟁 사진가로 기억되던 그에게서 발견된 또 다른 시선이었다.
마후트 전통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특정 코끼리와 한 쌍을 이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진 속 소년 곁을 지키는 코끼리의 눈길에는 단짝 친구의 정다움이 묻어난다. 맥커리의 ‘Animals’ 시리즈는 반려동물과의 교감부터 멸종 위기의 동물들까지 다양한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단호하다. 동물은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존엄을 지닌 존재이며, 하나의 소중한 생명으로 존중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 나아가 인간이 지켜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아프간 소녀의 초상처럼, 강렬한 한장의 사진으로 동물들에게도 받아 마땅한 위상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맥커리의 공감의 미학이다.
석재현 사진기획자·아트스페이스 루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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