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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들은 계절마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펼쳐낸다. 봄날 훈풍에 초록이 영글고 녹음이 짙어지다 가을엔 골골마다 단풍이 들어찬다. 그러다 세찬 겨울바람에 잎을 떨구고 나면 겨울나기에 들어가고 사람들의 걸음은 숲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숲이 침잠에 들어갈 무렵, 그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있으니 바로 자작나무다. 사실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호승 시인이 <인간의 가장 높은 품위와 겸손의 자세를 가르치는 나무>라 표현했던 자작나무는 헐벗고 추운 계절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껍질 속의 수분이 적어지면 새하얀 줄기가 더욱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추운 겨울 눈까지 힘을 보태 준다면 이보다 더 애잔하고 오묘한 풍경이 따로 없다. 이만우 작가 역시 2012년 봄 강원도에서 처음 자작나무를 만났다. 자작나무가 내뿜는 순백의 아름다움에 취해 감전된 듯 그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머물렀다고 첫 만남을 회상한다.
이만우 작가는 한국은 물론, 러시아의 시베리아, 그리고 중국 내몽골까지 10여 년간 집중력 있게 자작나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추위와 거친 바람을 맞으며 온전히 자작나무에 집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하얀 나무껍질에 새겨진 흔적을 마치 자신이 겪었던 지난 아픔의 상처로 공감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저 촬영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오롯이 자작나무에 투영한 이만우 작가는 자작자작 바람결에 들려오는 이야기를 감성적인 시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인간의 희로애락처럼 펼쳐지는 자연의 변화무쌍함. 그것을 풀뿌리처럼 견뎌내는 자작나무의 온전한 아우라와 울림을 고스란히 담고픈 마음에 다중노출로 포착한 자작나무는 그래서 더 강렬하다.
이만우 작가는 ‘자작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때, 마주하는 자작의 흔적으로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럴까. 기후와 빛의 변화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그의 자작나무 작업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세찬 바람에도 하늘 높이 곧게 뻗은 자작나무 숲들은, 그렇게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
석재현